뉴질랜드 가족

한국에 잘 다녀왔습니다.

All About 크라이스트처치 2014. 2. 18. 19:42

뜻하지 않게 급하게 다녀온 한국행이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많이 좋지 않으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여러 시점을 생각하다가 

결정하게 된 한국행이었습니다. 


뉴질랜드와 한국과의 물리적인 거리차를 생각할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다는 소식을 오전에 듣는다고 하더라도, 발인날에는

도착하기 쉽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에 그래도, 마지막으로 살아계실때 다녀오자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지난 9월 한국방문때 잠깐 뵈었을때에 부쩍이나 수척해지신 모습으로 뵈었었는데, 이렇게 이런 날이 빨리 올줄은 몰랐죠. 


지난 6개월동안 제 어머니가 할아버지를 간호하셨는데, 혼수상태에 들어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여러 생각들이 지나쳐갔죠. 

어렸을때, 방학때마다 한달씩 머물렀던 할아버지 댁에서의 기억들, 형과 싸우고 난뒤 무섭게 화해를 시켜주시던 할어버지의 모습

할아버지께서 직접 연을 만들어주셔서, 바람부는 날, 연을 할아버지와 같이 날리던 기억들, 군 복무를 할어버지, 할머니가 계시던 

시골과 가까운 철원에서 했는데, 외박을 나오면, 때마다 꼭 손에 쥐어주시던 5만원의 기억들....


저희 아버지와 어머니께는 꽤나 성격이 강하신 할아버지셨지만, 손자, 손녀들에게는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대해주시던 할아버지의

좋은 모습을 기억하려고 다녀온 이번 한국행은, 여러모로 뜻이 깊었습니다. 

비행기 티켓은 2월 7일 금요일에 사서, 2월 10일 일요일 새벽 비행기를 타는것이었습니다. 10일 오전 6시 비행기라, 출발전날인

9일 크라이스트처치로 미리 올라가서 하루를 자고 새벽에 출발했습니다. 9일 크라이스트처치로 출발하면서 찍은 가족사진입니다.

이렇게 갑자기 가게되니, 보내는 마음도 쉽지 않았나봅니다. 민우도 울고, 로니도 울먹울먹하더군요. 


이런 모습을 뒤로하고 다녀와야하는 마음 역시 쉽지는 않았습니다. 

오클랜드에서 홍콩행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시간이 촉박하게 구입한 항공권이라, 이거 저거 따질것 없이, 최대한 빨리 출발하는 항공권/적게 걸리는 항공권을 찾아보니, 

크라이스트처치-오클랜드-홍콩-인천 여정의 항공권이었는데, 오클랜드 출발하는 항공기가 늦게 출발을해서, 홍콩에 도착을 하니

갈아타야하는 항공기는 이미 출발을 해서, 어쩔수 없이, 8시간을 홍콩에서 더 보내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오후4시에 도착해서 

밤 12시까지의 시간까지 사용할수 있는 공항 바로 옆의 메리엇트 호텔/저녁식사까지 사용할수는 있었지만, 오히려 늘어지는

일정에 마음은 조급해지더군요. 


원래 한국갈때 첫날은 인천에 있는 제 best friend의 집에서 하루를 묵고 가는데, 일정대로 갔다면, 밤 9시에 도착을했겠지만, 

delay가 되어서 새벽 6시에 도착을 했기때문에, 바로 부모님 집으로 갔습니다. 아쉽게도 그 친구는 이번 일정에서 볼수가 

없었죠. 

홍콩에서의 호텔 

실제로 묵은 시간은 6시간정도밖에 안되는 홍콩 메리엇트 호텔 

홍콩 공항 

이틀을 걸려서 도착해서 잠깐 몇시간 눈을 붙이고 할아버지를 뵈로, 부모님과 함께 병원으로 가는 중입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말기폐암환자라서, 큰 병원에서 퇴원하시고 요양병원으로 옮기신지 며칠 안되었을때인데, 이미 제가 갔을때에는 

깊은 잠만 주무시는 상황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게 할아버지께서 아프시지 않는것이라고 생각을 했기에, 강력한 진통제를 

맞으셨고, 이와 더불어서, 의식이 없으시는 상황까지 계속 가게 됩니다.


2-3시간정도를 병원에서 할아버지 손도 잡아드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으나 들으셨을것이라고는 생각이 되지만, 

큰 반응이 없으신 할아버지여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새벽 1시에 병원에서 전화가 와서 급하게 병원으로 갔습니다. 

중환자실로 올라가신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아마 오래 남지 않으시겠구나라는 말을 병원에서 하더군요. 


황급한 모습을 보시이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제가 한국에 온것이 아마도 할아버지를 뵙기 위한 부분도 있었지만, 

제 부모님이 필요한 심리적인 서포트를 드리는 부분에서도 정말 잘 오지 않았나 생각이 들더군요. 

서울의 하늘은 이렇게 맑지 않더군요. 

대전에 있는 누나와 매형을 보러도 왔습니다. 

수요일 밤 매형과 함께 소주한잔하면서,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도 하구요. 

누나와 조카 녀석의 사진도 찍어봅니다. 

할어버지께서는 목요일 새벽에 돌아가셨습니다. 새벽 4시에 병원에서 전화가 가족에게 왔고, 저에게도 5시가 되기전에 전화가 와서 빨리 서울로 올라오라고 전화가 형에게 왔습니다. 저는 새벽 6시 차를 타고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었는데, 그 때에

할어버지께서는 임종을 하셨다고 하네요. 

저희 부모님이 임종을 보시고 마지막까지 끈을 놓지 않으시다가 형이 중환자실에 도착한지 1분만에 큰 한숨을 쉬시면서 

길었던 87년의 생의 끈을 놓으셨다고 합니다. 


시골의 장례식장입니다. 많은 분들이 오셨죠. 오랜만의 보게된 친척들부터 시작해서, 여러 아시는 분들까지...

토요일 발인으로 할아버지께서는 선산으로, 3년전 돌아가신 할머니 곁으로 가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마지막 몇일동안, 모든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시던 같았습니다. 뉴질랜드에서 온 손자에게까지 마지막으로 

손 잡아 드릴수있었던 시간도 주셨으니, 이보다 더 시간을 잘 맞춘 한국방문이 어디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3년전 갑자기 할머니께서 돌아가실때도 저는 로니, 민우와 함께 일주일간 한국을 방문하는 중이었고, 돌아가시기 이틀전날

건강하신 할머니의 모습도 보았었습니다. 


아마 여러 중요한 때에 가족가까이 있을수 있던것도 제 복인가 봅니다. 

다시 뉴질랜드의 일상으로 돌아와서, 다시 익숙해진 생활로 돌아가게 되네요. 

큰다는게 이런것 같습니다. 아직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한국나이로 36살, 어떤 인생을 살아야 좋았다고 기억할수 있는지 

고민을 하게 해 보는 시간들이네요.